ⓒ 강재승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문예창작콘텐츠연구소 대표) 반칙1 70년대엔 파란 표지의 학생건강기록부라고 하는 게 있었다. 1년에 한 번이던가 두 번이던가 학교 운동장에서 선생님의 관리 하에 개인의 운동능력치를 확인하고 기록해서 상급학교로 올려 보내는, 생활기록부와 쌍을 이루는 책자였다. 국민학교 6학년 가을 무렵이었다. 그 해엔 인근의 몇 몇 학교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한꺼번에 체력 테스트를 했다. 종목은 100미터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멀리 뛰기, 왕복 달리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수류탄 던지기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반 친구들이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 위해 대기할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곡선 주로에서 학생들이 질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대용으로 띄엄띄엄 세워둔 의자를 슬그머니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달리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의자를 밀어 넣은 만큼의 이익을 보는 셈이었다. 다른 학교와의 경쟁의 자리도, 다른 학생과의 비교의 자리도 아니었다. 등수나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기록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만했다. 분주히 오가는 학생들과 진행요원들 사이에 묻혀 발로 슬쩍슬쩍 의자를 밀어 넣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어린 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물론 ‘아, 저건 나쁜 건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에 엄격하기로 소문난 분이어서 의외의 행동에 더 정감이 느껴졌던 것일까 살짝 콧등까지 시큰거렸던 듯하다. 평소에 바른 생활을 강조하시던 분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어서 놀라긴 했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배신감이었다. 반칙2 할머니는 파리, 모기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만큼 산목숨을 중히 여긴 분이었다. 노년에는 먼 친척 한 분과 함께 고향의 깊은 산중 작은 암자에서 기거하며 밤낮으로 자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다녀가실 때는 부모님은 제발 그곳에 다시 가지 마시라고 만류해도 ‘내가 내 자식 손자 위해 하는 일이니 말리지 마라.’며 한사코 뿌리쳤다. 할머니는 ‘죄 짓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머지않아 하루 종일 걸어가야 겨우 사람 하나 만나게 되는 날이 다가온다.’며 선하게 살 것을 특별히 강조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장손으로 태어나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시며 부모님의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도 남기지 않고 막무가내 손자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기-승-전-장손’이었다. 그런 장손이 입대영장을 받고 인사차 왔으니 가만있을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암자와는 한참 떨어진, 할머니 동생분이 사시던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당신 손으로 밥이라도 며칠 해 먹여 보내려는 심사였다. 내가 무더위를 피하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방안에 드러누워 가져간 책을 들고 빈둥거릴 동안 할머니는 분주히 점심준비를 하셨다. 할머니가 어느 집에서 큼지막한 닭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오셨다. 닭은 생의 최후를 예감한 듯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애처롭게 퍼덕였다. 사실 애처롭기로는 삶에 대한 본능으로 발버둥치는 닭보다 할머니의 손아귀가 더했다. 곧 팔순을 바라볼 노파의 손아귀는 암탉의 결사적인 퍼덕임 앞에서 단지 애처로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닭의 절박한 발버둥이 할머니의 애처로움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양측의 차이는 손자의 유무였다. 나는 할머니가 계시는 사랑채 부엌 쪽으로 갔다. 갑종 1급의 현역입영대상자임도 당시 나에게는 닭을 잡을 용기나 요령이 요즘말로 ‘1’도 없었다. 단지 닭 모가지를 비트는 내 손이 할머니 손보다는 덜 애처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부엌 문턱을 넘기도 전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먼저 문턱을 넘어 왔다. “오지 말고 방에 들어가거라. 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 걸음을 멈춘 내 눈에 쪼그려 앉은 할머니의 등 너머로 임종을 앞둔 닭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들어가래도 그러는구나.”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등 뒤의 광경을 정확히 그리고 있었다. 할머니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그 날 점심 때 먹었을 닭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귀한 손자에게 ‘업’이 될 만한 일은 시키지도, 보게 하지도 않으려는 가여운 노인에 대한 기억만 새로울 뿐이다. 담임선생님과 할머니의 반칙에는 공통점이 있다. 평소의 신념이나 가르침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는 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당신들을 희생했다는 점, 타인과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착한 반칙’이랄까.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나를 감동케 했던 두 분의 ‘착한 반칙’은 정말 착한 반칙인 것일까? 이런 ‘착한 반칙’이 나쁜 반칙을 불러들이는 트로이의 목마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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